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 HOME
  • KIDA 연구물
  • 세계분쟁(WoWW)
  • 지역별 분쟁 분석자료

지역별 분쟁 분석자료

수단-남수단 분쟁(종료) 상세보기 화면
제목 수단-남수단 분쟁(종료)
지역별 아프리카
형식 개요
문서보기
공유하기


개요

수단 내전은 정치적 실권이 집중되어 있는 북부 아랍계 무슬림 정부와 남부의 기독교 부족들 간의 오랜 분쟁을 뜻한다1). 수단 내전은 크게 1차와 2차로 나뉘는데, 1차는 독립 직전인 1955년부터 1972년까지 약 17, 그리고 2차는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약 21년간 지속된 전쟁이다. 두 차례의 내전은 각각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북부 수단과 남부 수단 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남부 수단의 분리 독립 운동이라는 점에서 연장선상에 있으나, 2차 내전은 정치적 불평등뿐 아니라 수단의 주요 천연자원인 원유에 대한 경제적 권리 역시 분쟁의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2차 수단 내전의 경우 그 피해가 훨씬 심각했는데, 21년이라는 긴 세월 간 지속된 이 분쟁으로 인해 총 190만 명이 사망했고 400만 명이 넘는 남수단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기근, 소년병 등 많은 인도적 위기 상황이 야기되었다.

 

이 분쟁의 싹은 식민 통치 이후 독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독립 후 국가 경영과 관련된 대부분의 영역이 북부 수단인들에게 맡겨졌으며, 남부 수단인들은 배제되는 불평등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북부와 남부 간의 균형을 이루는 데 실패함에 따라, 권력을 이양 받은 아랍계 중심의 수단 정부는 연방 체제를 이루겠다는 남부 수단인들과의 약속을 파기하였다. 이로써 남부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고, 저강도 분쟁 양상으로 시작된 이들의 저항은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이것이 약 17년간이나 지속된 첫 번째 수단 내전으로서, 이 내전으로 1960년대 말까지 사망한 인원은 약 50만 명에 이른다. 이때 수장 정부군을 상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한 반군세력은 아냐냐(Anyanya)이고, 아냐냐의 리더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한 조직이 남부수단해방운동(Southern Sudan Liberation Movement, SSLM)이다. 이들은 아냐냐와 함께 분쟁의 주축세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남수단 자치를 위해 필요한 인프라 구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결국 1972년 아디스아바바 협정(Addis Ababa accords)을 통해 남수단의 SSLM과 수단 정부는 휴전에 합의하고 남부 내부 문제에 대한 상당 수준의 자치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이로써 수단 내전은 약 10년간의 소강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1983, 수단 정부가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파기함에 따라, 2차 수단 내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배경이 있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수단 남부 지역과 남/북 간의 경계에서 대규모 원전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이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갖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북부 지역이 가져야 했다. 또한 이 시기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으로 인해 수단 정부 내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강화되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아디스아바바 협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1983년 당시 니메이리(Gaafar Muhammad an-Nimeiry) 대통령은 남부 원전 지역을 장악하고, 남부지역과 무슬림들에게도 이슬람 법인 샤리아(Sharia)를 적용해 수단 전체를 이슬람 국가로 선포하려 했다. 이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남부 기독교계 흑인들을 중심으로 수단인민해방운동군(People’s Liberation Army, SPLM/A)이 조직되었으며, 남수단의 자치를 위하여 정부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던 중, 1985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니메이리 대통령이 실각하였고, 19864월 선거를 통하여 마디(Sadiq al-Mahdi)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 마디 정부는 SPLA와의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샤리아 법 적용을 폐지하고 헌정회의를 소집하는 내용을 담은 코카담 선언(Koka Dam declaration)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마디 정부는 평화 회담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내전의 양상이 더욱 악화되고, 국가 경제가 초토화되는 상태에 이르자 마디 정부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바시르(Omar Hassan al-Bashir)가 이끄는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마침내 1989년에 바시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마디 정부가 지속해오던 평화 회담과 계획들은 모두 백지화되었다.

 

한편 SPLA는 리비아, 우간다, 에티오피아의 지지를 받으며 남수단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부터 SPLA 안에 내부 권력투쟁과 분열이 발생하게 되자, 전세는 수단의 바시르 정부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정부는 1992년부터 대규모로 정부군을 투입하여 남부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남수단 내 전략적 요충지 상당수를 장악했다. 정부 정규군은 민병대와 합세하여 남부와 누바 산맥(Nuba Mountains) 일대를 공격하였다.

 

이 시기 수단 내전을 종결시키기 위한 주변 국가들의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일례로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지도자들은 동아프리카정부간개발청(Intergovernmental Authority for Development, IGAD)의 후원 아래 수단 평화 회복에 힘을 모았다. 1994, 이들은 공평하고 포괄적인 수단의 평화 정착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식별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DOP)을 공표하였다. 이에 사인하지 않던 수단 정부는 전장에서 SPLA에 패배한 후인 1997, DOP와 유사한 일련의 합의들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로써 1997년 정부는 IGAD가 중재하는 평화 회담에 나설 것에 동의하였으나 반란 그룹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1999년에는 3개월간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는 수단 반군의 공격이 강화되자 이를 적절히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에서였다. 1999년에는 정부가 원전을 부당한 용도로 이용하고 착취하기 시작하여, 갈등의 골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수단 정부는 SPLA/M와의 분쟁을 지속시키는 비용을 원전에서 얻은 수입으로부터 충당하였으며, 반란 그룹들은 외국 정유회사와 송유관을 공격하였다. 20021, SPLM/A는 수단인민방위군(Sudan People’s Defence Force)과 힘을 합쳤다.

 

폭력 사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평화를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이에 따라 2002년에 정부는 SPLM/A와 휴전 협정을 맺고, 뒤이어 마차코스의정서(Machakos Protocol)에도 합의하는 역사적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수단의 통치구조와 관련된 전반적 원칙에 대한 합의였고, 남부 지역 자결(self-determination)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수단 정부와 SPLM/A의 리더인 가랑(John Garang) 간의 협상은 계속되었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만큼은 휴전 상태가 유지되었다. 마침내 2005, 양측은 지난 2년 반에 걸쳐 합의해 온 내용들을 모두 담아낸 포괄적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 CPA)을 체결함으로써 분쟁을 끝내기로 했다. 이 협정을 통해 양측은 6년간의 전환기를 거친 후, 남수단에서 분리 독립에 대한 대국민투표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2011, 남부 수단의 분리 독립 여부를 정하기 위하여 1주일간 진행된 주민 투표 동안에도 유혈사태가 잇따라 벌어졌다. 그러나 투표 자체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90% 이상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투표 결과는 98.83%가 독립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남부 수단은 79, 193번째 유엔 가입국이 되는 정식 국가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석유 배분과 국경 책정 문제 등 분쟁의 불씨가 여전히 잠재하고 있는 까닭에, 수단과 남수단 간의 긴장은 분리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어왔다. 특히 20115월에는 북수단 군대가 풍부한 원유 매장지이자 양국 접경에 있는 아비에이(Abyei) 지역을 점령하여 이 지역 주민 10만 명이 피신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에 따라 내전의 재발을 우려한 유엔은 20118, 아비에이에 1,700명의 남수단평화임무단(UN Missions in South Sudan, UNMISS)을 주둔시켰다. 20124월에는 남수단이 수단의 영토로 되어 있는 아비에이 주 헤글리그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분리 독립 이후 가장 큰 교전이 벌어졌고,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유엔안보리가 결의안을 발표하는 등 국제사회의 적극적 중재와 압박으로 초기에 종결되었다. 2)

 

이후 남수단과 수단은 8월 송유관 사용료 분쟁을 일단락 시켰고, 9월 아디스아바바에서 나흘간의 협상 끝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 수단을 통한 남수단의 석유수출 재개에 합의하는 등 평화로의 이행에 있어 일정부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국경지역 반군들이 제거되지 않는 문제,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는 문제, 아비에이 지역, 종글레이 주 등 국경지대 분쟁 지역에 대한 소유권 문제 등 해결하지 않는 갈등 요인들이 많다. 분리 독립에 의한 부작용도 관측된다. 수단 석유 매장량의 75%가 묻혀 있는 남수단이 분리 독립함에 따라 수단은 연료 위기를 겪기 시작하였고, 이를 해결하고자 정부가 연료 보조금 제도를 중단하면서 휘발유 등의 가격이 최대 두 배로 인상되었다. 이로 인해 20139월에 하르툼과 다른 주요도시들에서 바시르 대통령 집권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어 2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야기하였다.3)

 

 

 

1) 남수단 부족은 크게 나일제족(Nilotic), 나일-함족(Nilo-Hamtic), 남서수단족(South-Western Sudanic)으로 나눌 수 있으며, 나일제족의 수가 가장 많다.

2) 헤글리그는 하루 115000배럴인 수단 석유 생산향의 절반을 정제하는 시설이 있는 곳이다.

3) 929일 현재 정부 집계로는 33명이며, 의료단체의 집계로는 200명 정도이다. 33명이라도 이는 바시르 대통령 취임 이래 반정부 시위로 사망한 인원으로는 최대 인원이다. 주영재 기자, “수단 반정부 시위로 200명 사망,”경향신문2013929.

 



일지

* 이전 일지 내용은 하단의 전체일지 다운로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1956-01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통치로부터 독립
1956~69 다수의 정권을 거치면서도 다수가 인정하는 헌법제정 실패, 정정은 지속 불안
1969-05 누메이리(Numeiri)의 쿠데타 성공, 국명을 수단공화국으로 개칭
1971 공산당 계열의 쿠데타로 누메이리 실각했으나 반공산당 계열의 역쿠데타로 곧 복권
1976 안사르(Ansar) 종족그룹에 의한 쿠데타 불발
일반게시판 화면 화면
다음자료 ▲ 시에라리온 내전
이전자료 ▼ 소말리아 해적(중단)